parody

INDEX : 기억상실증 : 4333 words

검은콩볶음 2020. 3. 12. 19:50



기억상실증 retrograde amnesia


* 구약 4권 시점에서 츠치미카도가 이미 카미조의 기억상실을 알고 있었다는 전제로 츠치미카도x카미조 요소가 있습니다. 츠치+카미로 보셔도 무방합니다.
* 카미조 토우마가 학원도시로 들어왔을 때 부터 인덱스가 베란다로 낙하하기 전까지 마술적인 요소 혹은 인물과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다는 전제를 두고 있습니다.
* 대사가 거의 없는 글입니다.

 

 

 

1.
7월 30일 이후 츠치미카도 모토하루가 카미조 토우마를 처음 본 것은 병실 복도에서였다. 정보 수집의 마무리 단계였다. 머리에 붕대를 둘둘 감고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카미조는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수술이 끝난 후 무사히 깨어났고, 그의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굳이 병문안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츠치미카도에겐 빨간 머리의 신부와 일본도를 든 소녀가 학원도시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정보를 취합해야 할 일이 있었다.



2.
그러고는 어땠더라? 츠치미카도는 언제나처럼 바빴다. 목숨을 내어놓고 사는 생계형 스파이는 연중무휴로 일하고 있었다.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마술사 세력 사이에서 줄타는 광대인 츠치미카도가 정보전쟁에 한 발 뒤쳐진다는 것은 다음 한 발 뒤의 쓰러짐을 의미했다. 아무튼 카미조의 얼굴을 보러 간 것은 좀 더 시일이 지난 후이다. 시간을 쪼개 오빠를 만나러 온 사랑하는 여동생이 갑자기 고열을 내는 바람에 초조해져서 문을 두드렸는데, 여동생이 아프다는 말에 두말없이 열을 재고 죽을 끓이고 약을 먹이고, 필요한 조치가 끝난 후에야 그 얼굴을 며칠이나 지나서 본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고맙다냥, 카미양. 그 소리에 카미조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니야, 여동생이 아프다는데 이런 것 쯤이야. 배알도 없는 오빠다냥, 신경쓰이게 만들어서 아픈 걸 쉬지도 못하게 하고... 그만큼 오빠가 소중하다는 거 아니겠냐, 그만 들어가서 마저 간호나 해줘. 난 들어간다. 카미조는 곧장 옆집으로 돌아갔다.



3.
뭐어야, 카미조는 돌아갔어어? 왠일이래, 혼신을 다해 이 마이카가 카레를 끝내놨는데 저녁 먹고 가지이... 열에 시달리는 시기는 지난 마이카가 늘어지는 목소리로 푸념했다. 저녁약속이 있는 거 아닐까냥, 그 녀석이라고 우리랑 매일 저녁 먹는 것도 아니고. 옆집에 있을 흰 수녀복의 소녀를 떠올리며 츠치미카도는 그렇게 대답했다. 카미조가 그와 매일 저녁을 먹는 사이는 아니지만 금서목록이 머물러 있는 동안 당분간은 겸상도 어려울 것이다. 츠치미카도는 그 수녀를 제 세력에서 멀리 운반해 다른 세력의 영역에 방임하도록 한 주범이 어느 여교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4.
정확히 해 볼까, 츠치미카도는 그 공범이다.



5.
츠치미카도 모토하루의 인간관계는 아주 어려서부터 비즈니스에 기반하고 있다. 가업을 이어받았을 때도 그것을 잃어버렸던 때도 아주 어린 아이었다. 스파이 생활도 그때부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의붓여동생인 마이카도 처음에는 일 때문에 얽힌 것이다.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반 친구가 생길 정도로 꼬박꼬박 학교를 다녔을까, 그것도 불투명하다. 학생이라는 신분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교통카드 발급하는 것 만큼 쉬운 곳이 지금의 츠치미카도가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같은 학교 같은 반 기숙사 옆 방에 서로 드나들 정도로 가까운 사이에 해당하는 인물. 카미조 토우마는 마땅하게도 비즈니스적으로 얽혀있다.



6.
이 관계는 상대가 일반인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다소 오래 된 편이다.



7.
츠치미카도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카미조 토우마와 그 주변을 관찰하고 필요한 경우 통제하는 것이다. 관찰은 상시업무이며 통제는 극히 드물다. 츠치미카도의 상사는 이 업무를 하는 이유에 관해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츠치미카도는 어차피 말단이라 중요한 정보까지 주어지지 않는다.



8.
어떤 대상을 밀착감시하는 방법은 그 대상의 삶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다. 인사를 하고,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고, 시간을 함께 보낸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함께 하는 순간 가치를 가지고 신뢰는 기억과 함께 자연스럽게 쌓이기 마련이다. 츠치미카도 모토하루와 카미조 토우마는 단 둘이 있을 때에도 그렇지 않을 때에도 대화가 끊이지 않는 사이다.



9.
여러 날 지켜본 카미조 토우마는 얼룩 한 점 없이 새하얀 일반인이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학원도시에 거점을 두면서 여러 유형의 능력자와 마술사를 직간접적으로 다수 접했다고 생각하지만, 카미조 수준의 '원석'은 그 중에서도 이례적이다. 평생 두고 연구해도 모자람이 없고 그 활용도 무궁무진하다. 마술 사이드에서 먼저 발견했다면 굉장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이 신성한 것으로 취급받던지, 혹은 사특한 것으로 취급받던지간에. 그러나 학원도시에서는 그 능력이 가치로 매겨지지 않는다. 선별주의적인 학원도시의 시스템에서 레벨이 낮은 인물들로 주변을 채우면 발현할 기회도 없어진다. 그의 주위에서 미묘하게 초능력이 먹히지 않은 이유는 '이매진 브레이커' 때문임에도, 특출난 불행함으로 인해 묻혀버린다. 카미조가 자신의 능력을 딱히 숨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 이유는 이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초능력의 강도가 가치의 척도가 되는 사회에서 디버프(Debuff)는 트집 잡히기 좋은 소재니까. 충분히 가치를 매길 수 있음에도 감추는 것에 어떤 목적이 있다고 츠치미카도는 짐작한다. 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10.
그렇지만 내놓지 않는 원석인 동시에 일반인인 카미조를 자신이 감시하는 이유가 뭔가, 에 대해서는 특정하기 어려웠다.
츠치미카도 모토하루는 마술 사이드에 대한 총괄이사장 직속 대응을 거의 전담하고 있다. 드나드는 마술사의 정보와 이력을 거의 전부 수집하고 필요하다면 나선다. 학원도시 내부의 일을 할 때도 있지만 그의 경력은 외부에서 더 유용하다. 음양도를 잃은 츠치미카도가 더 높은 레벨을 받았거나, 더 유용한 계열의 능력이었다면 지금처럼 곧 잘릴 꼬리처럼 히트맨으로 돌아다니지 않았을 경력이다. 흰 가운이나 전용 모니터실을 받았을 수도 있고, 12학구의 전통양식으로 마감된 가옥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을 수도 있겠지. 어느 면으로도 카미조 토우마와는 연관이 없다. 츠치미카도는 카미조의 프로필을 받고 난 이후로 계속 가까이에 있었지만 마술적으로 카미조와 얽혔던 적은 없었다. 레벨 0의 멍청한 원석과 수준이 맞는 패가 츠치미카도 외에는 없는건가? 마법명 버젓이 있는 전문인력을 낭비하는 신빙성 있는 이유라고는 그 정도였다.



11.
그 정도였지만, 우숩게도 카미조의 옆자리에 미끄러져 들어간 후로 츠치미카도에게 실망스러웠던 일은 없었다.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못해먹을 일도 없었다. 종교단체와 마술결사, 미친 과학자들의 알력다툼에서 벗어난 평범한 학원생활에서 못해먹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의문은 오래 풀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풀어 볼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12.
금서목록 쟁탈전은 츠치미카도가 인지한 카미조 토우마와 마술사이드의 첫 조우였다. 츠치미카도는 처음엔 마도서관의 임시동거라는 결과를 카미조 토우마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정 유형ㅡ여자아이를 위험에서 구해내는ㅡ 헤프닝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그 생각을 비웃는 것처럼 숨 돌릴 틈 없이 사건은 연달아 일어났고, 윈저 성 지하에서 엔젤 폴 사건의 주범으로 카미조가 지목되었을 때 드디어 해묵은 의문이 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원도시 바깥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휘말린 이상 카미조는 끊임없이 이쪽에 말려들 것이다. 총괄이사장이 이런 사건까지 염두했으리라 생각하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카미조와 같이 학원생활을 하는 것이 츠치미카도의 상시 임무임을 생각한다면 진짜 위험은 지금부터고, 지금까지가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던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암담한 미래를 곱씹던 츠치미카도는 총괄이사장에게서 엔젤 폴에 대한 별도의 지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3.
지금 당장 카미조가 있는 곳은 학원도시 밖이고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의 영향력이 온전하지 않은 곳이다. 이번 사건에 한해서 영국 청교도 소속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학원도시에서 간섭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결론까지 내린 후 츠치미카도는 자신의 정체를 카미조에게 털어놓자고 결심했다. 그 정도의 월권 행위가 총괄이사장의 플랜에 어떤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혹은 계산에 있을 일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지금 털어놓지 않으면 츠치미카도는 마술적 사건에 말려드는 카미조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번거로운 짓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발각당하는 것과 직접 밝히는 것은 다르지. 츠치미카도는 총괄이사장의 등을 찔러 보기로 했다.



14.
카미조는 별 탈 없이 멀쩡히 눈을 떴다. 손대중을 하긴 했지만 자기 손에 얻어 터져 실려간 거나 마찬가지라 내심 걱정했던 츠치미카도는 안도했다. 요즘들어 카미조는 병원에 자주 실려온다. 병도 아니고 외상으로 이렇게 자주 의식을 잃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츠치미카도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능력 개화 이전에는 술식으로, 지금은 미약한 오토리버스에 기대는 것이 츠치미카도가 버티는 방식이었다. 아무것도 들어먹지 않는 주제에 카미양은 몸 사릴 줄을 모른다니까. 이왕 병원에 왔으니 이전에 조사했던 사건들과 관련한 의료기록을 불법으로 열람할 생각을 하며 츠치미카도는 카미조에게 엔젤 폴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총괄이사장이 앞으로도 카미조를 마술적 사건에 끌어들인다고 가정하면, 적당히 아는 편이 나으니까. 마술사의 마법명도 모르는 신입이 까딱하다 어느 마술사에게 불벼락이라도 맞으면 츠치미카도의 일거리도 많아질 게 분명했다. 집이 날아갔다는 말에 소리를 지르는 카미조를 피해 병실을 나오며 츠치미카도는 병원 진료실의 위치를 가늠했다.



15.
학원도시의 최첨단 과학으로 전산화가 이루어진 병원에서 카미조 토우마의 정보를 빼는 것은 병원 밖에서 해킹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전자의무기록에서 빼낸 카미조의 차트에는 드물게도 [기록없음] 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수기 차트의 업데이트 누락인 모양이었다. 금서목록 쟁탈전 이후의 기록이었고 이사회와 연계되지 않은 병원이었기 때문에 츠치미카도는 누군가와 접선할 일도 없이 문병을 핑계로 들어와 빈 진료실에서 손쉽게 차트를 찾았다. 금서목록 쟁탈전이라. 츠치미카도는 총괄이사회에 바로 보고해야 하는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워낙 마술이 난무했어야지. 보고라기 보다는 정보 거래의 형태가 될 것이다. 카미조 본인에게 확인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마술사라는 것을 카미조가 알고 있으니 더 쉬울 것이다. 처음 자신이 마술사라고 밝혔을 때 생각보다 이것저것 묻는 일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의외이긴 했지만 츠치미카도는 그것이 잠시일 거라고 생각했다. 퇴원하고 나서는 질문세례가 이어질 것이다. 처음부터 카미조 토우마에게 접근하고 감시해 왔다는 말은 가능한 마지막까지 하고싶지 않지만,



16.
학원도시로 돌아온 이후 츠치미카도는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변명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잦은 지각, 결석, 조퇴나 의심스러운 행동, 파토낸 시간약속같은. 불행체질 탓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카미조도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 것들에 대한 대답이었다. 근본을 따지자면 친밀한 대상에 대한 애매한 죄책감이고 다시 말하면 스파이로서 감정 조절에 미숙하다는 것이었다. 대상과 너무 오래 가까이 있던 반동인건가. 거의 설레다시피 하는 자신이 츠치미카도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물론 진료실에서 자료를 빼내가는 순간까지 지속되는 감상은 아니었다. 츠치미카도는 손글씨로 쓰인,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쭉 따라 읽었다. 후두부에 강한 충격으로 인한 손상. 긴급수술. 경과.



17. 
그 후에 드디어 전산화하지 않은 내용이 이어졌다. 흘림체로 쓰여진 영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