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ody

INDEX : IN ALPHA : 1872 words

검은콩볶음 2015. 10. 3. 09:08

달성표용으로 쓴 것. 9번.

신약 9권 기반. 버전 알파의 카미조와 츠치미카도. 부조리하게 배열된 위상 안에서의 단상 날조.

 

 

 

 

*

 

 

 

잔해물에 가까운 작은 섬 위에는 단 둘 뿐이었다. 도쿄 만 위에 어느날 갑자기 생겨버린 어떤 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적으로, 혹은 잔해 속의 잃은 물건을 가지러 온 사람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그래도 책상은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페허에 가까운 배경 한 가운데에는 책상과 함께 의자도 있었다. 츠치미카도는 그 번듯한 목재 책상과 의자에 앉아있는 인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 앞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것은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생채기가 가득한 오른손에는 방금 전 츠치미카도가 건내 준 볼펜이 들려 있었다. 가까운 문구점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처럼 생긴 볼펜이었고, 츠치미카도 자신이 기억하기엔 분명 길거리에서 사용 소감을 적으면 무료로 배포하는 흔한 펜이었다. 그것에 특징을 좀 더 보태자면 그 펜을 무료로 배포한 것은 학원도시에서 디자인 연구를 하는 대학생들이었다. 펜을 쥐는 손의 각도를 계산해서 힘을 받는 곳에 미묘한 곡선을 넣어 잡는 위치를 뭐 어떻게 했다던가 하는 어찌 되어도 좋을 설명들이 기억을 따라 미간 사이의 주름을 지나는 듯 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츠치미카도는 그것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렇다면 글쎄, 그 중요한 상황이라는 것에 관련시켜볼까. 공짜 펜을 목적으로 츠치미카도가 적당히 소감을 쓰고 일어났던 때, 지금 츠치미카도의 앞에 있는 소년도 지금과 유사한 위치에서 책상에 앉아 같은 펜을 쥐고 소감을 쓰고 있었다. 슬쩍 내다 본 소감의 내용은 자신과 그리 다르지 않은 적당한 내용이었다. 소년이 받았던 펜을 어떻게 했는지 츠치미카도는 모른다. 아마 잃어버리거나 망가져서 버렸을 것이다. 소년은 유달리 불행에 특출났으니까.

 

 

문제는, 소년이 그때의 기억까지 버리지 않았다는 암시가 소년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랫만에 보네. 하고 손 위에 얹어진 펜을 보는 소년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에 츠치미카도는 제비초리부터 무언가 헝클어지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랫만에 보는 것이 그 펜인지 자신인지, 츠치미카도는 확정할 수 없었다. 섬 위에서 얼굴을 마주한 소년은 처음 인사를 했지만 츠치미카도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받을 수가 없었다. 그저 몇 개의 심벌이 박혀있는 서류봉투를 건냈고, 소년이 내민 손 위에 펜을 올려놓은 것 정도가 그가 한 일의 전부였다.

 

 

소년이 벗겨냇던 서류봉투 위에 무언가를 쓰려는 듯 자세를 바꾸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 츠치미카도는 자신이 소년을 과하게 주시하고 있던 것을 알아챘다. 소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어색하게 풀어졌기 때문이었다. 눈빛 한번 참 무섭네요. 소년이 봉투로 시선을 내리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뒤이어 펜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이전 신의 오른쪽자리였던 그녀와 협상한 내용이야. 기사파는 몰라도 청교파 쪽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니까 생각 잘 해 달라고 말 좀 전해줘. 그녀가 사상이 좀 과격하긴 하지만 그쪽에서 원하는 행패에는 이만큼 적격인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하는게 카미조 씨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개인적인 편지까지 포함해 수고스럽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끝에 가서 격식을 차리는 이상한 문장을 구사하며 소년은 엷게 웃었다. 열린 봉투 안으로 몇 장의 종이와 함께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는 작은 엽서가 보였다. 인덱스에게. 라고 쓰여있는 글씨는 방금 전까지 머리속을 채우고 있던 펜으로 쓴 것이었다.

 

 

츠치미카도는 지금까지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도쿄 만의 섬에 발을 디디고 나서 처음으로 소년의 눈을 마주보았다. 아마 자신의 눈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감정이 응축되어 있을 거라고 츠치미카도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좀 더 많은 원망이나, 아마도 좀 더 많은 경멸 같은 것들이, 반투명한 선글라스를 넘어서 소년에게 닿을 정도로. 봉투를 건내는 손이 잔뜩 긴장해 있는 걸로 봐서는 확실히 전해졌겠지만 그럼에도 츠치미카도를 주시하는 소년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에 대고 감상을 말하자면 전 세계의 모든 미디어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떠들고 있는 표현을 빌려 사탄 같은 새끼, 언제쯤 죽냐 미친놈아, 정도가 나와야 할 거라고 츠치미카도는 생각했지만 자신의 입에서 반쯤 잠긴 목소리가 뱉은 것은 영 다른 말이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거냐. 소년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츠치미카도는 나약한 소리를 한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어졌다. 그 말에 누구보다 기쁘게 웃는 소년의 얼굴을 보자니 더 그러했다. 세계가 지탄하는 주적을 웃게 했다고 쏟아질 의심의 눈초리들을 떠올린 츠치미카도는 이를 악물었다. 섬 내에 다른 세력의 감시가 붙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과학 측은 자신이 제어하고 있었으며, 마술 측의 추적을 따돌리는 것은 소년의 특기였으니까. 이미 지구 범위의 마술을 몇 번 전개했음에도 소년은 붇들리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더없는 재앙이었다. 고마워. 걱정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괜찮아.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한 길로 갈 테니까. 소년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변하지 않은 얼굴로 그런 말을 했다. 그 또한 재앙이었다.